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태어났다. 가네코 후미코는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했다. 부모가 후미코의 양육을 거부하는 바람에 출생 신고를 하지 못해 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아버지인 사에키 후미카즈는 히로시마현 아키군의 사족 집안 출신으로 일본제국 경찰로 근무했고, 농민의 딸이었던 가네코 도쿠노와 결혼한다.

 

이 인간은 가네코 도쿠노 외에 다른 여자들과 불륜 관계를 맺는 등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또한 술과 도박에 빠져 경찰직을 파면당하고, 가네코 후미코는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다.

 

가네코 후미코는 어릴 적부터 호적에 없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비국민 취급을 받으며 자랐다. 그로인해 입은 마음의 상처는 그녀가 아나키스트가 되는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아버지는 처제(후미코의 이모)와 눈이 맞아 가출했고, 어머니도 다른 남자와 동거했다고 한다.

 

 

 

일본인 대한민국 건국훈장

 

카네코 후미코는 8살에 일본에 친척집에 맡겨졌다가, 1912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던 고모의 집에 들어간다. 후미코는 식모처럼 부려먹으며 학대당한다. 그때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한다.

 

카네코 후미코는 1919년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 정신이 일기 시작하여 남의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감격이 가슴에 솟아 올랐다"라며 조선인의 처지에 자신의 처지를 투영해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에 깊이 공감한다.

 

후미코는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어머니는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외가와 짜고 후미코를 돈 많은 스님인 외삼촌과 강제로 혼인시키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 후미코는 학문에 대한 관심이 강해졌고,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가서 신문을 배달하고, 어묵집 점원으로 노동하며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아나키스트는 아나키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국가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억압과 지배를 반대하고 사회혁명을 통해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만나며 교류했다.

 

1922년에는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한다.

 

*흑도회 - 1921년 일본의 도쿄에서 박열, 조봉암등이 조직한 최초의 사회주의 단체

*흑우회 - 1920년대에 결성된 무정부주의단체

 

후미코는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박열과 뜻을 같이했다. 후미코는 박문자(朴文子)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옹호,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 의사를 도와 의열단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했다.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그리고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일본의 군경이 재일본 조선인들을 검거했을 때, 불령사 회원들과 함께 체포된다.

 

 

 

박열 가네코 후미코

 

취조 중, 박열이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무장투쟁의 하나로 일왕 일가에 대한 폭탄 테러 계획을 세웠던 것이 밝혀졌다. 박열과 후미코는 1926년 3월 23일 옥중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해 정식으로 부부가 된다.

 

그리고 이틀 뒤, 25일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과 정의감에 감동한 판사에 의해 4월 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박열은 이치가야 형무소,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로 이감된다.

 

후미코는 형무소에 수감된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전향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했다. 그녀는 옥중에서 많은 수기를 썼다.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23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후미코의 유골은 박열의 변호사였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에 의해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군 팔영리 주흘산 자락에 묻힌다. 박열의사기념관이 건립된 후, 그 옆에 묘소가 조성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카네코 후미코에게 2018년 3월 1일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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