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사망자 및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내용을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4.19혁명은 다들 아시다시피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의 부정으로 촉발되었습니다. 이 선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극심한 부정선거였습니다.

 

그로 인해 4.19혁명 사망자는 어마어마했습니다. 4.19혁명 사망자는 몇 명이나 될까요..?

 

지금부터 4.19혁명 사망자 및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4.19혁명

 

4.19혁명 사망자

4.19혁명 사망자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은 4선을 노렸고, 부통령은 이기붕이 출마했다. 당시 자유당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무려 12년간 이어진 이승만의 장기 독재 체제로 민심은 뿔났다.

 

자립 기반이 취약한 경제는 만성적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며, 산업은 침체되고 실업률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또한 미국이 한국을 직접 원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한국과 일본의 지역 통합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당이 우호적 일리 없었다.

 

그런데,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사망한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 후보가 되며, 당선이 확실시된다. 하지만, 이기붕은 위태로웠다.

 

이기붕은 당선이 되기 위해 선거에서 온갖 부정을 저지른다.

 

선거 당일부터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개되었다. 경찰의 진압으로 사망한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전국으로 퍼져 갔다.

 

4월 19일, 약 3만 명의 대학생,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수천 명은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경찰들은 발포했고, 서울에서만 약 130여 명이 사망,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 사망했다.

 

또한 6,026명이 부상당했다.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정권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다. 1960년 4월 26일 새벽 6시경 허정은 하야를 권고할 결심으로 경무대를 방문한다. 이승만은 이미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하야하겠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25일 저녁에도 학생들이 많이 죽고 다쳤다'라는 보고를 받고, "어떻게 국민들을 죽일 수가 있느냐. 내가 물러 나야지" 하며 하야를 결심했다고 한다.

 

허정은 그 모습을 문전에서 보고 목이 메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했다. 그 후, 대국민 담화문을 통해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 정부통령 재선거, 이기붕의 공직 사퇴, 국민이 원하면 본인이 책임지겠다'라고 약속했다.

 

1960년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했고, 즉시 수리된다.

 

부통령 당선자 이기붕은 4월 28일 경무대에서 장자였던 이강석에 의해 죽는다. 그리고 가족들은 모두 타살되었다.

 

 

 

최종 요약

  1.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극심한 부정선거.
  2. 4.19혁명 사망자는 전국적으로 186여 명.
  3. 이승만은 하야했고, 이기붕은 장자였던 이강석에 의해 죽는다. 가족들 모두 타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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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사망자 및 이승만 대통령을 알아보았습니다.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른 것도 궁금하시다면 상단의 글들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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