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간의 난

 

회안대군 이방간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神懿王后) 안변 한씨(安邊韓氏)의 넷째 아들이다. 회안대군 이방간은 함경도 함흥부 귀주동에서 고려 공민왕 13년(1364년 7월 2일)에 태어났다.

 

회안대군 이방간은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인물이다. 2차 왕자의 난은 박포의 선동으로 인해 이방간이 군사를 일으키면서 시작된다.  그로인해 이방원도 사병을 동원했고, 결국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진다.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회안대군 이방간은 어떤 인물일까?

 

이방간은 고려 말에 관직에 올라 군기시소윤(軍器侍少尹)을 역임했다. 그리고 아버지인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을 때, 개국익찬공신 1등에 책록 되고, 현록대부의 벼슬을 받았으며, 마한공(馬韓公)에 봉작(封爵)되었다.

 

그 후, 조선 태조 1년(1392년) 8월 25일 회안군(懷安君)에 봉군 되었고, 1398년 회안공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를 역임했다.

 

하지만 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유배를 갔고, 유배 중인 태종 1년(1401년)에 회안대군이 되었다.

 

 


 

 

■ 2차 왕자의 난

 

2차 왕자의 난

 

회안대군 이방간은 태조 7년(1398년) 8월 동생인 '정안군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제거할 때 가담하여 정사공신 1등에 책록 되었다.

 

그 후, 이방원 일파가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지만 사병을 거느린 형제들이 여럿 있었고,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이방원은 이들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고, 항상 견제했다. 회안대군 이방간 역시 왕위를 계승하려는 야심이 있었다.

 

야심은 있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회안대군 이방간은 항상 시기심과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중, 박포의 밀고가 있었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는 밀고하는 등 난의 성공에 공이 많았다. 하지만 일등공신에 오르지 못했고, 불평하다가 죽주(現 충청북도 영동)로 귀양 간다.

 

박포는 불만을 품고 있던 중, 이방간이 이방원에 대해 불평하자 거짓 밀고를 한다. '이방원이 이방간을 죽이려 한다' 이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을 일으킨다. 이에 이방원은 사병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인다.

 

전투는 이방원의 승리로 끝이나고, 이방간은 체포된다. 그리고 박포는 사형당한다.

 

 

 

 

이렇게 이방원을 반대하는 세력은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끝내 이방원의 정치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난이 평정되고 이방원의 심복인 참찬문하부사 하륜의 주청을 받아들인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결국 왕위는 이방원에게 넘어간다. 그가 바로 조선 제3대 왕인 '태종'이다.

 

태종 16년(1416년)에 회안대군의 작위와 공신녹권, 직첩, 아들 의령군의 직첩은 모두 회수된다. 회안대군은 다시는 한강을 건너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1418년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양위한 뒤에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주문했지만 거절한다.

 

이후 모종의 거사를 계획하였지만 실패한다.

 

세종 3년(1421년) 음력 3월 9일(4월 10일) 홍주(洪州)에서 병사했다. 태종의 권고로 와병 중에 상경하던 중 홍주군 은진에서 사망했다. 태종은 사람을 보내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지관을 보내 시신은 전주부 동용진면 금상동 법사산(現 전주시 덕진구)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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