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

문재인 정부는 광복절을 기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홍범도의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가져와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고, 대전국립현충원에 묻었다.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 제19사단을 크게 무찔렀다. 홍범도와 최진동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올렸다. 아무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가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과 나중소, 이범석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이 모인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했다. 홍범도는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해 큰 공을 세웠다.

 

여기까지 홍범도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독립운동가로 암울한 일제 강점기 초기에 승전보를 울린 위대한 사람이다.

 

 

 

대한민국 문재인 대통령

하지만 이후 홍범도의 행보는 너무나 이상했다. 과연 문재인 정부가 한 일이 옳을까?

 

홍범도는 평양 출신으로 이상하게도 사망할 때는 소련인이었다. 사망지는 '소련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키질로르다'로 현재 '카자흐스탄 카질로드다'이다.

 

홍범도는 원래 무학에다가 머슴 출신이었다고 한다.

 

다들 알다시피 독립군은 양반 기득권 출신들이 많았다. 그 이유가 일본에게 기득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웃기게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모였는데도 상놈 출신들은 받지 않았다. 대단한 민족이다.

 

홍범도는 포수였다. 사격술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산에서 사냥을 하면서 먹고살았다. 일제가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총포 단속을 해서 수렵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건설현장, 종이공장, 광산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한다.

 

 

 

1895년 홍범도는 의병에 뛰어들어 함경북도 갑산, 무산 등지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그 당시 독립군들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고, 일제에 의해 진압을 당했다. 그리고 일제는 강압적으로 치안을 유지하려고 했다.

 

당시 3·1 운동을 주도했던 양반 세력들과 의병 세력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갔다. 일제 관련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나라를 위해 간도로 간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간도에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아 이제는 뭔가 하겠구나 했지만, 실상은 매우 달랐다. 그들이 모여서 하나로 뭉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조직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중 하나가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이라 볼 수 있다. 알려진 단체만 30여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단체가 하나로 뭉쳤다면 당시 일제의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을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부정시험이 발생했는데, 피해를 본 수험생들이 각자 각개전투를 하고 있다. 그들이 모두 모여 한 목소리로 외쳤다면 벌써 해결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몇 명씩 모여 단체를 만들고, 심각한 곳은 우두머리를 하려고 싸우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단체마다 투쟁하는 노선도 달랐다. 소련 계열, 중국 계열, 민족주의 계열. 정말 위대한 분들이다. 일제에 맞서 싸워야 했으며, 그 안에서도 자기들끼리 서로 견제하며 세력 확장을 한다는 것이 보통일일까?

 

 

 

(좌) 이동휘 / (우) 홍범도

그 당시 대한 임정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맡았는데, 이 사람은 임시정부 내외의 동조세력을 규합하고 사회주의 운동 확산을 위해 힘썼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충돌하였다. 이동휘는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으며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였다.

 

끝내 이동휘는 상해 임시정부를 탈퇴했고, 고려공산당(상하이파) 창당에 나섰다. 그리고 레닌 밑으로 가게 된다. 이동휘는 레닌에게 100만 루블 거액을 받고, 대한독립군들을 소련 적군(赤軍)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 홍범도가 포섭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동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유시(스보보드니)로 오라고 했다. 여기에 오면 소련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며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일본과 다시 싸워보자라고 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자유시로 향했다. 여기에서도 서로 의견이 부딪혔다. 또 분열이 되어 소련의 적군파와 백군파, 고려공산당의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 등.

 

결국 '자유시 대참변', 독립군이 궤멸된다. 장갑차와 중화기까지 동원해 독립군을 학살했다.

 

광복군 참모장을 지낸 김홍일 前 육군 중장의 증언에 의하면 그 당시 홍범도 부대에 독립군 700~800명이 사망, 수백 명이 부상, 1000여 명은 시베리아 벌목공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소비에트 군으로 편입되었다.

 

자유시 대참변은 '소련 볼셰비키 정권'과 '일제'가 비밀협정을 맺어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일본이 철수하는 대신 한인무장독립군 정리를 일본이 소련에 요구해서 벌어진 계략이었다.

 

흐름을 보면 소련은 이동휘를 이용했고, 이동휘는 홍범도를 앞세웠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으로부터 금화 100루블과 군복 한 벌, '홍범도'라고 새겨진 권총을 선물 받았다. 또한 그의 휘하 병력 300명을 소련 적군에 편입시켰고, 본인은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임명된다.

 

1927년에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도 했다. 심지어 소련 국적도 얻는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광복할 때까지 봉오동 전투나 청산리 대첩과 같은 승전보는 없었다.

 

 

 

(좌) 김좌진 / (우) 홍범도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의 마지막은 완전히 달랐다.

 

김좌진 장군의 경우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했고, 1929년 한족총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에서 갈등이 격화되었다.

 

김좌진 장군은 공산당과 일정 거리를 두었고, 결국 공산주의 선동에 방해되는 이유로 1930년 1월 24일 김일성(본명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고려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북한 당국이 공식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이 봉오동전투의 주역인 홍범도는 수록한 반면, 청산리 대첩을 이끈 김좌진 장군은 이름조차 넣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조선대백과사전은 홍범도를 '반일 의병대장, 독립군 지휘관'으로 소개하면서 김일성의 언급도 함께 수록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었다. 유명한 의병대장인 홍범도는 자체로 쇠돌을 녹여 화승대를 만들고 철알을 부어가지고 왜놈들을 무찔렀다"

 

조선대백과사전은 청산리대첩을 '청산리전투'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며 "청산리전투는 봉오골(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군운동 때 반일 독립군 무대들이 진행한 가장 큰 싸움으로서, 당시 조선민족의 반일 적개심을 고무하는데 일정하게 이바지했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김좌진 장군의 존함은 없고, 홍범도만 거론하고 있다.

 

 

 

레닌과 히로히토

도대체 왜 이럴까? 왜 북한이고, 대한민국이고 홍범도를 이렇게 까지 띄울까?

 

홍범도가 일제 강점기 초기에 승전보를 울린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이건 아니라고 본다. 이런 자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공항까지 마중 나가 유해에 거수경례까지 했다.

 

비참하게 학살당한 독립군의 영혼과 그들의 후손들의 볼 면목이 없다.

 

이상하다. 정말 큰 공을 세웠어도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면 친일파로 몰아버리고, 반민족행위자라며 그렇게 욕을 하면서 정작 소련과 공산당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들은 별로 욕을 먹지 않는다.

 

그 예가 바로 홍범도이다.

 

대통령은 6·25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백선엽 장군 장례식에는 그가 만주군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문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레닌에게 군복과 돈, 총을 받고 소련 공산당에 입당을 하며 소련 국적도 얻은 홍범도에게는 유해를 대한민국으로 가져와 1등급 '대한민국장'을 추가 서훈하고, 대전국립현충원에 묻었다.

 

만약 홍범도가 히로히토에게 군복과 돈, 총을 받고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일본 국적을 얻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의 공을 인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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