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1910년 8월 29일, 우리나라는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했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넓은 행정 청사가 필요했고, 부지(敷地)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일제가 선택한 조선총독부 부지는 경복궁이었다. 조선의 궁궐이었던 경복궁 앞뜰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올릴 경우 조선인들에게 정신적·심리적 타격까지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흥례문을 비롯한 주위의 행각(行閣)을 철거, 경복궁을 완전히 가리는 방식으로 청사를 올렸다.

 

*행각(行閣) - 궁궐 또는 공공 건축의 중심이 되는 건물 주위에 둘러 지은 구조물.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가 완공된 후에는 청사를 가린다는 이유로 광화문까지 동쪽으로 해체·이전했다.

 

조선총독부는 해방 이후에는 중앙청으로 이름만 바꿔 정부 청사로 활용했다. 또한 1948년 5월 10일 중앙청(조선총독부) 중앙홀에서 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 국회를 개의했다.

 

같은 해 중앙청(조선총독부) 메인홀에서 헌법을 공포하고, 앞뜰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을 거행했다.

 

즉, 우리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지은 건물에서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정부는 새로운 청사를 지어 이전하는 계획을 세웠지만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계획은 좌절되고, 결국 1982년까지 대한민국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조선총독부 철거

1986년 중앙청(조선총독부)은 개·보수 작업을 거쳐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탄생한다. 

 

이 과정에서 철거 논의를 했지만 철거 비용과 대체 건물을 마련해야 한다는 경제적 문제,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이 설득력을 얻으면서 흐지부지하게 넘어갔다.

 

철거 주장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힘을 받기 시작했다. 

 

1993년 8월 10일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정기의 회복을 위해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가능한 한 조속히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경축식에서 조선총독부 '중앙돔 랜턴의 해체'를 시작한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철거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다. 공개집회를 하며 김영삼 대통령을 규탄했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보류 동의안' 제출, '건물 훼손 및 철거 금지 가처분 신청'

 

일본은 본국으로 이전하겠다며 대한민국을 압박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강행했다.

 

 

 

김영삼 前 대통령

"우리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의 잔재인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 시작한 것도 역사를 바로 잡아 민족정기를 확립하기 위한 것입니다. '역사바로세우기'의 참뜻을 이해하고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1996년 1월 9일 김영삼 대통령 연설)

 

1996년 11월 13일 총독부 청사의 지상 부분 철거 완료.

 

1996년 12월 완전 철거.

 

1998년 8월 8일 독립기념관은 중앙돔 렌턴과 건축부재로 '조선총독부 철거부재 전시공원'을 개원하여 공개했다.

 

결국 식민총치의 모습도 있었지만 건국과 호국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었던 중앙청(조선총독부)의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선총독부 철거 김대중도 반대?

 

김대중 前 대통령

조선총독부 철거에 대한 반발이 생각보다 많았다.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니 보존할 필요가 있다'라는 정치권과 학계의 주장.

 

김종필 前 국무총리는 '치욕의 역사도 역사다'라며 후세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다. 이어서 "역사의 영광은 나누고 치욕은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바로 후세가 발휘해야 할 지혜다. 부끄럽다고 해서 지워 버린다고 그 역사가 생략되지 않는다"며 자신은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반대했음을 밝혔다.

 

그리고 김대중도 조선총독부 철거를 반대했다. 그는 1993년과 1995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긍정의 역사도 있으니 충분히 논의해야"한다며 의견을 피력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으로 비판을 받은 반면 김대중은 달랐다.

 

그가 대통령이 된 후에도 실리주의 외교를 택하며 한일관계를 풀려고 노력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참의원(상원) 연설에서 "50년도 안 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500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며 "일본에는 과거를 직시하고 역사를 두렵게 여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고, 한국은 일본의 변화된 모습을 올바르게 평가하면서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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