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 KBS 드라마 '태조 왕건'

고려의 개국공신 박술희(朴述希)는 신라 말기 ~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혜성군(면천)이며, 면천 박 씨의 시조이다. 시호는 엄의(嚴毅)이다.

 

박술희는 어려서부터 체격이 좋았고, 용감했고, 땅강아지, 두꺼비, 개미를 먹어치울 정도로 식성이 좋았다고 한다.

 

혜성군은 개국 일등 공신인 복지겸의 고향이기도 했고, 해상무역의 요지였다고 한다. 이들은 같은 해상 출신이라 '왕건'이나 훗날 태조 왕건의 왕비 '나주 오 씨'와 친밀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8세에 왕건의 도움으로 궁예의 호위병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박술희는 왕건에게 충성을 다했고, 전쟁터에서는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훗날 912년 왕건의 장남으로 '무(혜종)'가 탄생했다.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안되어 무를 태자로 책봉했다고 한다.

 

그 과정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무의 어머니 집안이 신분적으로 미천했고, 권력이나 군사력이 부족해 반대세력들이 많았다. 또한 태조 왕건의 결혼 정책도 한 몫했다.

 

태조 왕건은 태자들이 입는 옷인 자황포를 상자에 담아 장화왕후 오씨에게 줬다. 박술희는 태조의 뜻을 알아차리고, 무를 태자로 책봉할 것을 청해 마침내 무를 태자의 자리에 앉혔다.

 

이 부분을 보면 태조 왕건이 박술희를 얼마나 신임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태조 26년 4월, 왕건은 임종을 맞아 미리 써두었던 '훈요 10조'를 박술희에게 넘겼다. "그대의 힘으로 무가 태자가 되었음을 경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디 태자를 잘 보필하여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시오"

 

태조 왕건의 마지막 부탁을 받은 박술희는 눈물을 흘리며 굳게 다짐했다.

 

 

 

이미지 출처 -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하지만 태조 왕건의 유언이라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건이 죽고, 스물다섯 명의 아들들이 모두 왕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의 아들들 보다, 그들의 아버지나 장인 등 친척들이 미쳤던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안달 난 인물이 '왕규'였다.

 

왕규는 혜종(무)의 장인이었다. 혜종의 제2비 후광주원부인 왕 씨가 바로 왕규의 딸이었다.

 

왕규는 태조 왕건에게 자신의 두 딸을 바쳐, 혜종에게는 장인이면서 동시에 외할아버지가 되는 막장 같은 족보였다. 왕규의 딸과 태조 왕건 사이에서 탄생한 아들이 광주원군인데 혜종의 이복동생이다.

 

왕규는 원래 이름이 함규였다. 광평성의 차관급이었는데, 훗날 태조 공신이 되어서 왕 씨 성을 하사 받아 왕규라 된 것이다. 그도 태조 왕건에게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태조 왕건이 정치적으로 우세한 왕규의 딸을 혜종(무)와 맺어줌으로 힘을 보강해 주려고 한 것이다.

 

 

 

이미지 출처 -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태조 왕건이 죽고, 혜종은 많은 세력들에게 도전을 받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명순성태후 유 씨의 아들인 요와 소였다. 이들은 태조 왕건의 둘째 셋째 아들로 유긍달의 외손자였다.

 

신명순성태후 유 씨는 충주의 호적으로 왕건에게 투항하며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충주 유 씨 세력은 서경 세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혜종보다 더 큰 세력을 가졌었다.

 

요와 소는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고, 그것이 불만이었다.

 

이런 움직임을 파악한 인물이 왕규였다. 이 인간은 혜종에게 역적이 있을 것이라 아뢰기도 했다. 세력이 약했던 혜종은 알면서도 그들을 제거하기보다는 회유하려고 해 자신의 딸을 소와 맺어주기까지 한다.

 

왕규는 불만이었고, 이쪽저쪽 벌려놓은 일이 많아 자신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쁘게 움직였다. 이에 왕규는 사위 혜종을 제거하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이미지 출처 -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혜종의 침실로 자객을 보냈지만 실패한다.

 

다시 왕규는 밤에 직접 무리를 거느리고 혜종의 침실로 들어갔으나, 혜종이 없었다.

 

혜종은 모두 왕규의 소행인 줄 알았으나 처벌하지 못했다. 왕규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었고, 자신의 장인이었던 그를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혜종은 병이 들었고, 후사를 결정하지 못했다.

 

혜종의 제1비 진천 임 씨에게서 탄생한 흥화궁군을 후사로 삼고 싶었지만 나이가 너무 여렸다. 처형의 아들이며 장인의 외손이기도 한 광주원군을 후사로 하기에는 첫째 이복동생인 요가 걸렸다.

 

요는 혜종이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박술희가 반역을 꾀했다고 모함해 갑곳으로 유배를 보내 살해한다. 왕규도 이일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한다.

 

왕규나 요에게는 박술희가 공동의 장애물이었다. 요는 박술희를 제거한 뒤, 서경의 왕식렴 군대를 끌어들여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장애물인 왕규를 제거했다.

 

박술희와 왕규는 동료였다고 한다. 둘 다 태조 왕건의 신임을 받았고, 혜종의 후견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혜종이 위기를 맞자 둘은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언을 끝까지 지켜 혜종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반면 왕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위였던 혜종을 제거한 뒤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앉히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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