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토 마코토(齋藤實), 그는 누구인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1858년 12월 2일에 태어나 1936년 2월 26일에 사망했다. 그는 제5대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근무하며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시켜 친일파를 양성해 보다 효율적으로 식민지배를 하려 한 인물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유학 생활하며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해군 대장과 해군 대신을 지냈고, 조선총독부 총독도 역임했다.

 

1919년 9월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는 남대문역에서 내리다가 강우규 등의 폭탄 습격을 받았다. 하지만 죽음은 면했다.

1925년에는 자작이 되었고, 1932년 ~ 1934년 내각총리대신, 1932년 ~ 1933년 겸임 외무대신, 1933년 겸임 문부대신을 지내다가 1934년 사퇴했다.

 

1936년 2월 26일(2·26 사건) 일본 육군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1483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으킨 반란에 의해 사이토 마코토는 암살되었다.

 

 


 

일본 최초의 주재무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사이토 마코토는 이와테현(岩手縣)에서 몰락한 사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도미고로(富五郞)였는데, 나중에 마코토(實)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해군병학교를 졸업했다. 해군병학교는 해군사관학교로 생각하면 된다. 1884년에는 미국으로 유학 갔고, 유학 생활 도중 해군장교 겸임 주미일본공사관 주재무관의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 당시 해군병학교를 나와 미국 유학을 갔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엘리트라 생각하면 된다.

 

1888년까지 일본 최초의 주재무관으로 머물며, 국제적인 안목을 키워나갔고, 영어도 유창하게 잘했다고 한다.

 

그 후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으로 돌아와 아키즈노즈(秋津洲)호, 구마(嚴島)호의 함장을 지냈다. 이어서 야전과 참모, 궁정직을 돌아가면서 경험했고 1897년에는 한 달 만에 2계급을 고속 승진하여 대좌(대령)에 올랐다.

 

1900년 5월 해군 소장으로, 1904년 6월에는 해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사이토 마코토 총리

 

사이토 마코토 총리

사이토 마코토는 러일전쟁에 참여했고, 해군차관에 임명된다. 러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실질적으로 해군의 경영을 틀어쥔 해군의 실력자였다고 한다.

 

1905년 1월, 선박 건조를 담당하는 부서인 해군 감정본부장(艦政本部長)으로 부임했다.

 

사이토 마코토는 일본의 조약파(런던 해군 군축조약 유지를 지지하는 온건파)였다. 자유주의 성향을 가졌고, 서방 세계에 대한 인식과 경험도 풍부했다. 거기에다가 해군 중장 '니케 카케노리' 제독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배경도 좋아졌다.

 

1906년에는 해군대신에 임명되다. 해군 건설, 러일전쟁 승전 공로로 '남작 작위'를 수작받았고, 1912년 해군대장으로 승진한다.

 

191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 내각이 지멘스 사건으로 무너졌다. 사이토 마코토도 책임을 지고 해군대신에서 사퇴했으며, 퇴역하여 예비역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조선 총독으로 임명이 되었다. 총독으로 부임하던 날, 남대문역에서 강우규의 폭탄 습격을 받았으나 운 좋게 살아남았다.

 

사이토 마코토는 조선인의 저항을 무력화하려는 '문화통치' 정책을 추진하며 친일파를 양성해 민족을 갈라놓으려고 했다. 실제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고, 독립운동이 계파 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925년에는 자작이 되었다. 1927년 제네바 군축협상에 전권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총독에서 잠시 물러났다가 1929년에 총독에 재임명된다.

 

1931년 조선총독직을 사임하고, 1932년 일본의 제30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사이토 마코토 암살

 

사이토 마코토 암살

1932년 거국일치 내각을 조직하여 수상에 취임한다. 또한 만주국 승인과 국제연맹에서 탈퇴, 농촌 구제사업을 추진하며 민심과 내분을 수습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한다.

 

사이토 마코토는 만주 사변 이후 국가의 총제적 군국화를 주장했다.

 

1932년 외무대신을 겸하고, 1933년 외무대신에서 물러나 겸임 학무대신이 되었다.

 

1934년 내각의 비리로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에 천황의 내대신(內大臣)이 되었다.

 

그는 총리 시절과 현상 유지를 주장했고, 황도파 청년 장교들로부터 주적이 되었다.

 

결국 사이토 마코토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황도파 청년 장교들은 1936년 2월 26일(2·26 사건) 쿠데타를 일으켰다.

 

사이토 마코토는 1936년 친영미파(親英派)로 지목되어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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