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 또는 단천연은법(端川鉛銀法)은 16세기 연산군 시기에 조선에서 발명된 은광석에서 순수 은을 추출하는 신기술이었다.
이 신기술은 조선에서 만들어졌으나 조선에서는 적폐청산과 은이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좋은 일만 시키게 되었다.
일본은 연은분리법으로 본국의 은 생산량을 크게 높였고, 17세기에 이르러 세계 은 생산량 1/3이나 차지했다. 그 당시 이와미 은광 같은 경우에는 볼리비아 포토시 은광과 더불어 세계 제2의 은 생산지로 꼽힐 정도였다.
연은분리법은 훗날 일본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은 생산으로 나온 부로 명나라와 서양으로부터 많은 선진문물을 들여왔고, 조총을 구입한 비용도 조선과의 전쟁에서 투입된 막대한 군자금도 다 은이 있어서 가능했다.
즉, 조선이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조선의 신기술이 임진왜란의 발판을 만들어 준 것이다.
「연산군일기」에 의하면 양인 '김감불'과 장례원 소속 노비 '김검동'이 아뢰었다.
"납(鉛鐵)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습니다.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 재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
연은분리법, 단천연은법, 회취법(灰吹法)이라고 명명된 이 방법은 금속의 녹는점을 이용해 은을 추출하는 방식이다. 은광석(은이 포함된 광석)과 납을 섞어 태워 혼합물을 만든 뒤 이것을 다시 가열해 녹는점이 낮은 납은 재에 스며들고 순수한 은만 남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이례적으로 남은 화학 실험이며, 납으로부터 은을 분리해 내는 기법과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연은분리법은 고급 기술에 속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은광석을 계속 가열해 남은 재에서 순수 은을 걸러내는 고대 기술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노동력이나 시간을 많이 들였음에도 은의 생산량은 적었다.
이런 고급 기술을 조선에서는 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을까?
아쉽게도 연산군이 이 기술을 직접 관람했다.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히 남겨졌다고 한다. 연산군은 사치를 장려한 유일한 군주였다고 한다.
연산군은 최대의 은광이 있는 함경도 단천에서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연산군이 사치를 좋아해서 그런지 관료들은 더했다. 그 당시 호조판서(現 경제부총리)는 '채은납세제(採銀納稅制)'를 시행하고자 건의했다. 민간에서 은 채굴을 허용하고, 세금을 걷자는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1인당 하루 1냥(兩)을 은 현물로 납세를 걷었다고 한다. 그 당시 큰 액수였다고 한다.
이것을 제대로만 했어도 일본처럼 국가 수입이 크게 증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 고급 기술은 특정인에게 채굴권을 주고, 면세 혜택까지 주면서 국정농단에 악용되었다고 한다. 특히 연산군의 후궁인 장녹수(장숙용) 집안이 단천 은광 사업권으로 큰 부를 쌓았다고 한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적폐청산의 대상이 되었고, 은광 개발을 억제하는 등, 은광을 폐쇄해버린다.
물론 적폐청산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납은 매우 위험하다. 조선시대 연은분리법이 아무리 신기술이라 해도, 납 노출에는 매우 취약했을 것이다. 은을 생산하며 많은 백성들이 고통에 시달렸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잘 활용해서 은의 생산량이 증폭했어도 명나라가 곱게 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중종실록」 중종 34년 8월 19일 기록에 의하면..
"왜인과 서로 통하여 연철을 많이 사다가 불려서 은을 만들고 왜인에게 그 방법을 전습한 일은 대간이 아뢴 대로 국문하라. 서종은 비록 무반(武班) 사람이라 해도 벼슬이 판관에 이르러 무식하지 않다. 또 불러서 은을 만드는 일은 사람마다 하는 일이 아니요, 반드시 장인(匠人)이 있고 난 뒤에라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 집에 장인이 있고 없는 것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증거가 없고 형벌을 한 번 받고 병이 났으니 또 재차 형벌을 가하면 죽을까 걱정이다"
고급 기술인 연은분리법의 일본 유출 사건은 '유서종'이라는 종 4품 판관에 의해 발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연은분리법은 일본의 은 생산량을 증폭시켰다.
일본은 15세기 후반만 해도 후추, 특산품을 조선에 바치며 인삼과 호랑이 가죽, 은을 요청했다. 하지만 중종 37년 일본 사신이 은 8만여 냥(3200kg)을 가져와 무역을 요구한다.
17세기 일본은 은의 30% 생산하는 국가가 되었다. 조선의 신기술을 일본에서 제대로 활용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일본은 큰 부를 바탕으로 네덜란드, 영국 등과 무역했고 서양의 신기술을 받아들였다.
임진왜란에 사용했던 조총도 여기에 포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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