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거류민들의 폭동 '삼포왜란'

태종 7년(1407년) 부산포, 내이포 개방. / 세종 8년(1426년) 염포를 개방.

 

왜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3포(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방하고, 왜관(倭館)을 설치하여 교역과 접대의 장소로 삼았다. 조선은 3포에 한하여 일본 무역선이 오고 갈 수 있게 허락하였고, 무역과 어로가 끝나면 60명에 한하여 거류민을 허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선 조정의 명을 어기고, 점차 거주하는 왜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세종 말년에는 약 2,000명으로 증가했다. 조선의 관리들은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일본 거류민들을 압박했고, 자주 충돌이 발생했다.

 

몰래 거래하거나, 밀거래하는 상품도 늘면서 다양한 문제점이 발생한다.

 

심지어 일본의 대마도주는 삼포에 자신들의 자치 조직을 만들었다. 더 나아가 면호를 공물로 받아가기도 했다. 한때, 조선 조정에서는 조선에서 농사를 짓는 일본 거류민들에게 세금을 거두자고 했으나, 끝내 면세 혜택을 이어갔다. 

 

 

 

'삼포왜란'의 숨은 공신은 '장무공 황형 장군'

중종이 즉위하자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일본 거류민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기에 이른다. 삼포에 더 이상 외교적인 혜택은 용납되지 않았다.

 

세금을 철저하게 부과했고, 초과된 인원은 대마도주에게 철거를 요구했다. 또한 일본 선박 감시 등 엄격하게 법규를 적용한다. 이에 일본 거류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경제 활동이 위축된 왜인들은 대마도주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5천 명으로 폭동을 일으킨다. 우두머리는 오바리시와 야스코이며, 그들은 예도(銳刀)와 갑옷으로 무장했다. 이 사건이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이다.

 

조정에서는 즉시 황형을 좌도방어사, 유담년을 우도방어사로 임명해 삼포의 폭동을 진압하게 한다.

 

 

 

삼포왜란

왜인들은 부산포, 내이포에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고, 웅천성과 동래성까지 침공했다. 그들은 성을 포위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삼포왜란에 참전한 황형 장군은 육지에서 기마병(騎馬兵)을 이끌고 당시 무사들이 잘 사용하지 않았다는 '칼날에 깃털을 달은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 같은 긴 무기를 휘둘렀다. 40일 동안 마치 볕집을 베듯이 왜적을 사살했다.

 

폭동의 주모자 대마도주의 아들 '소사'가 죽고, 왜인들이 대마도로 도주하면서 삼포왜란은 진압된다.

 

조선 측은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사망, 제포 첨사 김세균이 납치, 군민 270여 명이 피살, 민가 796여 호가 불탔다.

 

일본 측은 배 5척이 격침되고, 300여 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삼포왜란으로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모든 왜인들은 추방이 되었고, 죽인 왜인들의 무덤을 따로 만들어 후에 들어오는 왜인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삼포왜란을 승리로 이끈 황형 장군의 공을 중종은 연미정을 하사했다고 한다.

 

조선과 일본의 통교는 중단이 되었다.

 

 

 

조선과 일본의 외교

이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일본은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과의 외교를 다시 재개할 것을 요청했다.

 

두 차례에 걸쳐 일본 국왕의 명을 받고, 대마도주가 삼포왜란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일본은 삼포왜란 때, 난을 일으킨 주모자를 처형하며 조선에 바치고, 포로를 송환하면서 화친을 청했다.

 

끝내 대마도주와 임신약조를 체결하고,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는 재개되었다.

 

조선은 내이포만 개항하였고, 거래하는 선박 수와 인원 등을 더 강화하고 제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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