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가산산성(漆谷 架山山城)

칠곡 가산산성(漆谷 架山山城)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산98-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지정면적 19만 4,777㎡, 높이 901m에 산골짜기를 이용하여 600m에 이르는 내성, 중성, 외성을 갖추고 있다.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이전부터, 성이 곧 국경일 때 우리 민족은 많은 성을 쌓았다. 특히 삼국시대에는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성도 많이 축조되었다. 그로 인해 축성 기술이나 형태도 많이 발전했다. 이후 천 수백 년 동안 큰 변화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축성도 하고, 성곽을 고치기도 했으나 거의 잊혀가고 있었다.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착각에 몇몇 왕들은 평화만을 고집하며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무너져 내리자, 다시 한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장군들이나, 지배층들은 충주, 용인, 진주성 싸움 등 일부 국지전에서의 패배가 평야 전 때문이었다는 분석을 한다. 참고로 충주 탄금대 전투나 용인 전투는 지휘관의 무능으로 인해 패배했다.

 

그렇게 종래의 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군사적인 요충지마다 새로운 산성을 구축했다. 전란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말이다.

 

 

 

인조 17년(1639년), 경상도 관찰사에 제수된 이명웅(李命雄)은 인조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경상도 예순 고을 산성 가운데 믿을 만한 곳은 진주, 금오, 천생의 세 군데밖에 없으므로 적당한 곳을 골라 산성 증축을 하자고 말했다.

 

4월에 근무지에 도착한 이명웅은 가산의 지리가 편리함을 조정에 보고하고, 9월부터 인근 고을의 젊은 남자들을 징발했다. 공사에 참여한 인원만 10만여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산성은 1640년 4월에 준공했다.

 

막대한 자금도 들었고, 감사의 가혹한 독려로 공사 도중 많은 백성들이 죽었다. 민심은 동요했고, 이명웅도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고 끝내 1640년 7월에 해임되었다.

 

 

 

백성들의 피와 눈물로 맹글어진 산성

내성의 규모는 성벽의 둘레가 약 4km에 달하는 4,710보(步), ⓘ여장이 1,887첩(堞)이었으며, 동·서·남·북문의 세 성문이 설치되고 ⓘ암문도 여덟 개가 있었다고 한다.

 

ⓘ여장 -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성위에 낮게 쌓은 담장.

ⓘ암문 - 비상 출입을 하기 위해 만든 작은 성문.

 

 

 

칠곡 가산산성

산성 안에는 네 곳의 ⓘ포루, 한 군데의 ⓘ장대, 산성에 필수적인 샘이나 우물이 21개, 기타 많은 부속시설이 들어서고 사찰도 넷이나 자리 잡고 있었다.

 

ⓘ포루 - 성을 효과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성벽을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그 위에 대포를 쏠 수 있게 장치한 누각.

ⓘ장대 - 전투 시, 군사의 지휘가 용이한 지점에 축조한 장수의 지휘소.

 

 

 

가산산성

숙종 26년(1700년), 내성이 완성된 지 60년이 지나고 당시 관찰사 이세재(李世載)의 장문(壯聞)에 따라 외성을 축성했다. 외성의 길이는 3,754보, 여장 1,890첩, 문루 하나, 암문 셋, 군기고를 비롯한 창고, 그 밖의 부속건물로 이루어졌다.

 

1701년 외성 안에 천주사(天柱寺)를 짓고, 여기에 승창미(僧倉米)를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가산산성에서는 성안에 절을 짓고 승려를 모집하여 궁술을 연습시켰다. 봄과 가을에 승장(僧將)을 뽑는 제도가 있었다. 이렇게 선발된 승장들이 지휘하는 승병들이 성 일부의 수비를 담당했다.

 

*승장(僧將) - 승려로서 이루어진 군대의 장수

 

 

영조 17년(1741년) 관찰사 정익하(鄭益河)의 건의와 주도로 중성을 축성했다. 성벽 길이 602보에 여장 402첩, 중문 하나, 문루 하나, 별장(別將)이 머무리는 건물 등이 설치되었다.

 

1745년에는 중성 안에 빙고(氷庫)를 축조하기도 했다. 

 

 


 

해원정사(解圓精寺)

 

해원정사(解圓精寺)

칠곡 가산산성(漆谷 架山山城) 외성(外城)에 '해원정사'라는 사찰이 있다.

 

1965년 곽용득이 용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그리고 1981년 해원정사(解圓精寺)로 변경했다. 대지 면적 3,618㎡, 건축 면적 407.42㎡에 법당 2동과 요사채 1동, 산신각 1동으로 구성되었다.

 

1984년 법당을 신축, 1999년 요사채를 증축.

 

다양한 크기의 석탑과 석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대웅전 뒤편에 이세재불망비(李世載不忘碑)가 놓인 비각과 6기의 비석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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