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관(白樂寬)은 개항기 개화를 반대하는 척사 상소를 올린 유학자이다. 그의 본관은 남포(藍浦), 자는 경교(景敎)이며 호는 추강(秋江)이다.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병조참판 백홍수(白弘洙)의 아들이다.
백낙관이 성장하는 동안 조선은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은 정신 차리지 못하고, 제 밥그릇 챙기기에 미쳐있었다. 그뿐만인가? 왕실은 콩가루 집안으로 등극해 조선의 운명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특히 일본은 대놓고 조선 침략을 노골화시키는데, 조선은 아무런 대책 없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를 반복한다. 세도정치에다가 이하응과 민비의 싸움에 구한말 조선은 아주 대단했다.
조선 정치에 대한 의분한 청년 백낙관은 1880년(고종 17)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상소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백낙관은 체포되었다. 그리고 곧 석방되었다.
그럼에도 청년 백낙관은 조선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1881년 청주에서 한홍렬(韓洪烈)과 함께 충청도 유림의 명의로 척사 상소를 올리려다 실패했다.
지금이나 구한말 조선이나 백성들의 소리가 왕에게 닿기란 하늘에 별따기였나 보다.
1882년 5월 4일 밤, "불이야! 불!" 고함 소리가 경복궁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경복궁에서 불이 난 것이 아니라, 맞은편 남산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남산 봉수대였다.
그 당시 남산 봉수대에 불이 타올랐으면 아마 서울 장안은 난리가 일어나 정신없고, 어수선했을 것이다.
전국에 걸쳐 연결된 봉수대가 위급한 사항을 중앙에 전달하는 마지막 종점이니 왕도 놀랬을 것이다.
이 무렵 전국 곳곳에서 소요가 발생하고 있는 터라 모두 긴장했고, 궁궐 수비대 군인들이 남산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지 않는 조선에게 청년 백낙관이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남산 봉수대에 도착하자 청년 백낙관은 도망치지 않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불을 질렀소!"
"나는 충청도 보령군 주산면 동오리에 사는 백낙관(白樂寬)이오. 어서 나를 체포하여 궁궐로 데려가시오!"
청년 백낙관은 담대했고, 그의 의지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민 씨 세도정치의 폐습과 일본의 야욕을 척결하는 상소문을 가슴에 지닌 채, 백낙관은 고종에게 닿았다.
불을 지른 연유를 고하고, 바른 정치를 간청했으나 무능한 고종은 어쩔 줄 몰라했고, 백낙관은 감옥에 갇힌다.
이 사건은 구식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게 밀려 급료도 제대로 못 받고, 차별대우에 불만이 높았던 구식 군대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1882년 6월 9일 일본 순사 등 일본인 13명을 살해, 일본 관련 건물을 불태우거나 파괴했다.
군인들의 급료를 담당하는 선혜청 관아를 급습했고, 중신인 이최응을 죽인다. 이 사건이 '임오군란'이다.
민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을 하고 도망갔다.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공사 등 공사관들은 인천으로 도망갔다가 영국의 배를 얻어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군인들은 옥에 갇힌 백낙관을 구출하고 "백충신! 백충신!"이라 연호했다. 백낙관은 구식 군인들에게 영웅이 되었다.
하지만 청년 백낙관은 "나를 투옥시킨 사람들의 정당한 판결에 의하지 않고는 나가지 않겠다"라며 스스로 감옥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하응(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백낙관은 정식으로 석방되었다.
그것도 잠시 민비가 이하응을 실각시키려고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하응이 청나라에게 잡혀 가고, 민비는 권좌에 오른다. 백낙관은 민비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1883년 8월 29일 38세에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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