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게오르크 엘저(Johann Georg Elser), 1903년 1월 4일 ~ 1945년 4월 9일
그는 나치즘에 반대하였던 용감한 독일인이다.
만약, 뮌헨 상공에 짙은 안개만 끼지 않았더라면 독일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1939년 11월 8일, 하늘은 무심하게도 뮌헨 상공에 짙은 안개를 내렸다.
그 짙은 안개는 독일의 역사를 비극으로 바꿔버리고, 세상에 아픔과 고통을 주었다.
히틀러 암살 실패는 '안개'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 저서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자금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독일 전역을 누비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선동의 기술을 마음껏 뽐낸다.
히틀러는 독일의 여러 도시를 다닐 때, '융커스 Ju-52(승객 20~30명 수용) 항공기를 자주 이용했다. 그 당시 돈 많은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최고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항공기였다고 한다.
1939년 11월 8일 밤, 뮌헨의 맥주홀 '뷔르거브로이켈러'의 연단에서 히틀러는 '맥주홀 봉기' 16주년 기념 연설을 끝내고 융커스 Ju-52 항공기를 이용해 떠날 예정이었다.
이 사실을 '게오르크 엘저'가 알게 되었다.
그는 홀로 히틀러 암살이라는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게오르크 엘저는 조용한 성격에 목공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정말 대단한 것은 어떤 조직이나 단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아무런 지원 없이 혼자서 히틀러 암살이라는 일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점이다.
게오르크 엘저는 매일 밤, 맥주홀에 잠입했고 3개월동안 총 30번을 왔다 갔다 반복했다.
그는 히틀러가 연설할 주변의 기둥 내부를 부숴 비우는 작업을 반복해서 했다. 부숴서 나온 먼지나 조각들은 가방에 담아 나왔다고 한다.
기둥은 비워졌고, 그 공간에는 폭탄으로 채웠다.
폭탄은 1939년 11월 8일, 밤 9시 20분에 폭파될 예정이었다.
폭탄의 타이머는 현대 기술자들도 감탄할 만큼 섬세하고, 정교했다고 한다. 나치즘을 반대하는 게오르크 엘저의 의지는 대단했다.
하지만 당일, 뮌헨 상공은 짙은 안개로 덮였다. 히틀러가 항공기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
히틀러는 어쩔수 없이 열차를 선택했다.
히틀러가 탈 열차는 9시 30분에 출발 예정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시간은 촉박했고, 히틀러가 평소보다 연설을 짧게 끝내고 사람들과 인사도 간단하게 끝마쳤다.
그리고 9시 7분에 맥주홀을 바쁘게 빠져나가버렸다. 히틀러가 나간뒤, 9시 20분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8명이 죽고, 63명이 부상당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없었다.
게오르크 엘저는 스위스로 도피하려다 국경에서 붙잡혔다.
나치는 히틀러 암살 사건이 게오르크 엘저의 단독범행이 아니라, 영국 첩보기관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선전했다. 나치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를 입증하겠다며 게오르크 엘저를 강제수용소에 가뒀다.
그리고 1945년, 히틀러는 전쟁 승리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게오르크 엘저를 죽이라고 명령한다.
게오르크 엘저는 1945년 4월 9일 바이에른 다카우 수용소에서 숨을 거뒀다.
독일에서는 게오르크 엘저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그는 독일에서 '위대한 독일인'으로 불리고 있다.
안드레 슈미츠 前 베를린 시 문화장관은 "엘저가 용기의 표상인데도 그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은 영웅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엘저는 스스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결정했다"라고 말했다.
2021.01.17 - [역사이야기] -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아돌프 히틀러의 이루지 못한 꿈.
2021.01.09 - [정치이야기] - 제1차 세계대전과 프로파간다 포스터 - 대한민국의 선전 선동은?
2021.01.08 - [역사이야기] - 박탈감과 증오를 이용한 '히틀러 선동', 우리의 박탈감을 이용하는 자는?
2020.11.20 - [역사이야기] - 독일 나치당의 창시자는 히틀러가 아니다?
2020.11.18 - [정치이야기] - 황당한 노벨평화상 후보, 전두환 前 대통령도 후보??
2020.09.16 - [역사이야기] - '공포'를 이용한 정치인들, 공포정치가 가능한 이유
2020.08.05 - [역사이야기] - 나치 히틀러는 화가가 될 수도 있었다?
2017.12.30 - [역사이야기] - 1934년 FIFA 월드컵은 막장 월드컵이었다.
2020.08.30 - [역사이야기] - 이오시프 스탈린, 아버지에게 칼을 던졌다.
2021.01.14 - [역사이야기] - 쿠데타 일으킨 베니토 무솔리니, 병역기피자였다?
2020.07.17 - [역사이야기] - 무솔리니도 금모으기 운동을 했다??
2020.08.06 - [역사이야기] - 베니토 무솔리니는 원래 이름까지 사회주의자였다?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년 '백낙관', 남산 봉수대에 불을 지른 이유는? (0) | 2021.04.08 |
---|---|
식목일 유래, 공휴일 폐지이유(다시 공휴일 지정할 수도..) (0) | 2021.04.02 |
이성계 할아버지 이춘(도조)의 설화, 백룡을 돕다? (0) | 2021.03.30 |
일부 언론은 사회적 기생충, '언론통폐합' 내 의지로 관철 (0) | 2021.03.29 |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직지심체요절'을 구매했다. (0) | 2021.03.28 |
최근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