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멸망은 시월드

시월드는 '시댁', '시집살이'를 나타내는 신조어라고 한다. 여성들은 결혼해서 시댁에 가면 항상 모험이 펼쳐진다. 끊임없이 '시'가 붙은 높으신 어른들, '일'이라는 빌런과 미친 듯이 싸워야 한다.

 

시부모의 끊임없는 욕심, 남편은 나 몰라라, 며느리는 희생, 결국 집안은 파탄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마지막도 시월드였다.

 

이하응은 그저 힘없고, 나약하며 자신의 말을 순종하며 나랏일에 간섭하지 않는 며느리를 원했다. 그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어떻게 하든 며느리였던 민비를 굴복시키려 온갖 더러운 짓을 다했다.

 

고종은 부인이 죽던 말던 다른 여자에 빠져있었고, 아버지와는 달랐던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결국 민비의 손을 잡는다.

 

민비는 시월드에서 허덕이며 어쩔 수 없이 이삭 줍기를 하며 사람들을 모아 시아버지인 이하응에게 맞섰고, 끝내 외세도 끌어들인다.

 

결국 조선 멸망은 시월드였다. 나라가 망국에 이르렀음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며느리를 도구로 생각한 이하응

 

이하응(흥선대원군)

이하응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 안동 김 씨 김병학의 딸과 김병문의 딸 중에서 며느리를 정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약속을 뒤집으면서 이하응을 지지하던 일부 안동 김 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된다.

 

1866년 대비 조 씨는 고종의 왕비를 정할 간택령을 내린다.

 

골 때리게도 간택령에 따라 조선에 있는 처녀들에게 금혼령을 내렸다고 한다. 초간택에 민자영이 5명의 후보에 들었다. 재간택에 거쳐 삼간택 때. 민자영은 고종의 왕비로 선정되었다. 이후 민자영은 13세의 나이에 고종과 혼례를 올린다. 민자영은 훗날 민비다.

 

이하응은 누구를 고종의 왕비로 들일지 고민이 매우 많았다. 이하응이 민자영을 받아들인 이유가 그녀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친척들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없기에 그녀가 나랏일에 간섭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이라 착각했다.

 

훗날 민비는 이하응에게 번번이 맞섰고, 그의 권력을 잘라내기까지 한다.

 

 


 

고종의 마음은 갈대

 

고종

민비가 입궁할 무렵에 15세였던 어린 고종은 다른 후궁인 귀인 이 씨를 남달리 귀여워하고 사랑했다고 한다. 민비와 혼례를 한 첫날, 귀인 이 씨의 처소에 들어갔다. 

 

1868년 4월에는 귀인 이 씨가 완화군을 탄생시켰다. 고종은 헤벌레, 이하응 역시 좋아했다.

 

민비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이럴 거면 왕비를 왜 뽑나 싶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민비는 이삭 줍기를 시작한다. 민승호 등 일가친척, 풍양 조 씨의 조영하, 안동 김 씨의 김병기, 이최응, 최익현 등과 살길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조영하는 이하응의 집권에 공을 세웠지만 그의 손에 축출되었고, 안동 김 씨는 이하응이 배신했고, 이최응은 이하응의 형인데 사이가 좋지 못했고, 최익현은 서원 철폐의 불만이 많았던 인물이다.

 

민비는 자신의 입지를 넓혀 나갔고, 차츰 고종도 마음의 문을 열었다. 1871년에는 고종과 민비의 사이에서 아이가 탄생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항문 폐색으로 5일 만에 죽었다.

 

왕자의 죽음은 이하응이 달여준 약에 산삼을 많이 넣었기 때문이라고 민비는 의심했다.

 

 


 

며느리 반격

 

'콩가루 집안'의 표본?

이하응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입을 모았다.

 

1873년 최익현이 이하응의 섭정은 옳지 못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해임당했다. 민비는 최익현의 뒤를 지원하며 당상관 정 3품 통정대부 돈령부 도정으로 올렸다. 

 

최익현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막아 내기도 했다. 이하응에게 무시당하던 종실 일부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고, 이하응이 당쟁을 근절한다는 명분 아래 남인과 북인을 채용하자 여기에 반발한 노론계 단체 역시 포섭을 하였다.

 

그렇게 조금씩 힘을 키워 최익현을 다시 호조참판으로 올렸고, 그는 다시 이하응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 논의 끝에 1873년 11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이하응의 전용 문을 폐쇄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이하응의 11년간 간섭은 종결이 되었다. 하지만 간섭은 계속되었고, 복귀하려고 발버둥 쳤다.

 

 


 

피를 보자꾸나

 

조선 멸망은 시월드

1874년 2월에는 민비가 이척(순종)을 탄생시킨다. 1875년 2월 이척은 왕세자로 책봉된다. 이하응의 세력에서는 최익현을 암살하려 했고, 민비는 최익현을 일시적으로 유배 보낸 뒤 다시 등용하고 승진시킨다.

 

민비는 이하응이 권력에서 배제한 개화파를 대거 등용한다.

 

그렇게 쇄국을 버리고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며 개화파를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비가 개화파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민비는 그저 이하응에게 대응하기 위해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개화파를 배제하려는 모의도 꾸미기도 했다고 한다.

 

1881년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완은군)은 안기영 권정호 등과 함께 음력 9월 13일로 예정되었던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보고, 유생들을 동원해 고종과 민비를 폐위하려고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한다.

 

1874년 민승호와 그의 아들, 부인 등 일가족이 폭탄테러로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민승호는 민비의 오빠였다. 이 사건의 배후로 이하응이 지목되자 명성황후는 이를 갈며 보복을 노린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잠시 민비의 권력이 주춤했고, 우호세력을 중용하여 강화한다. 1876년 조일수호조약을 맺고, 개화 정책을 시행한다. 그리고 노론 계열 개화사상가 박규수를 우의정에 등용하고, 이하응의 쇄국정책을 전면 폐기한다.

 

또한 이하응의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 경상도관찰사 김세호를 차례로 파면하고 유배 보냈다.

 

 


 

눈이 돌아버린 시아버지

 

임오군란

이하응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봉기한 구식 군대의 추대로 재집권한다. 민비는 죽을 위험에 처했으나 변장을 해 홍계훈의 등에 업혀 여주로 내려가 은신하게 된다.

 

1882년 6월 10일,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당한다.

 

난병이 민겸호를 만나 잡아끌자, 그는 이하응을 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말했다.

 

이하응은 웃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민겸호는 총칼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이하응은 "중전마마는 어디 계시느냐"며 소리치며 눈이 돌았다.

 

그리고 끝내 민비를 찾지 못하자 이하응은 죽었다고 발표하고, 국상 절차를 밟았다.

 

 


 

외세를 끌어들인 며느리

 

외세를 끌어들인

이하응을 실각시키려고 민비는 청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결정하고, 제독 오장경은 산둥성 옌타이에서 군함 3척과 상선 2척에 3000명의 병력을 태워, 경기도 남양만의 마산포에 상륙한다.

 

청군은 명동과 용산, 한성 등 여러 곳에 주둔했다.

 

그러자 일본은 청나라의 군대 파병에 대한 "일본인 보호"의 명목으로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지휘 아래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한다.

 

일본은 이하응의 협의 요청을 무시한 채 한양으로 들어갔다가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이하응의 입장으로 인천으로 되돌아갔다. 청나라 오장경은 일본군이 퇴각한 틈을 타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한다. 

 

그날 밤, 한성은 청나라 군에 의해 장악당했다. 민비는 청나라 군대의 보호 하에 입궁한다.

 

이후로 민비는 급진 개화파 등을 정권에서 점차 배제시키며, 친청 정책으로 기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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