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마저도 이용한 미개인들

1873년 민비의 세력에 의해 이하응(흥선대원군)은 힘을 잃고, 한 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이하응은 최익현과 척화파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나랏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이하응의 영향력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척화파들이 움직이려고 했으나, 마침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 조선은 쇄국을 버리고 개국을 하게 되며, 개화의 길로 향하게 되었다.

 

이하응의 세력인 척화파들은 관직을 박탈당하고, 투옥되기도 했다. 그리고, 수구파, 개화파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결국 민 씨 정권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서양 열강들과 불평등 조약을 연이어 맺었다. 때문에 척화파와 민심은 요동쳤다. 삼정의 문란 때문에 위태로운 조선에 사회적 혼란과 불안은 더 증폭된다.

 

이하응은 나라의 위기를 자신들의 힘을 되찾는데 이용한다. 그들은 백성들의 아픔을 이용한 미개인들에 불과했다.

 

민비는 자신의 힘을 더욱 키우고, 기반을 다지기 위해 요직에 자신들의 사람들로 채워나갔다.

 

1881년 일본의 후원으로 '별기군'이 창설된다. 총책임자는 민영환의 부친 민겸호였다. 민겸호는 민비의 친척 오빠이자 이하응의 처남이었다.

 

1882년 훈련도감·용호·금위·어영·총용, 5영을 무위영과 장어영 2영으로 축소하며 대량 해고시킨다. 별기군은 민비의 사병과 다름없었다.

 

 


 

별기군과 구식군대 차별

 

임오군란

민 씨들의 탐욕에 의해 나라의 재정 상태는 말이 아니었고, 구식 군대는 봉급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13개월 동안 지급되지 못한 봉급을 쌀로 때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쌀마저도 겨와 모래가 섞여있었다.

 

뿐만 아니라, 구식군대들은 전세난 고충이 심했다.

 

그 당시 한양의 주택 가격과 전세 가격은 폭등하고 있었다. 1년 동안 봉급을 받지 못한 그들은 전셋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집도 잃고, 돈도 없고 아무 희망도 없던 그들은 끝내 반란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임오군란이 봉급으로 받은 쌀에 모래가 섞여있어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삶이 벼랑 끝까지 몰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 와중에도 민 씨 가문에는 뇌물을 바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양의 주택난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한양은 인구 10만 명 안팎을 목표로 지은 계획도시였으나 이미 인구가 50만 명을 넘어서면서 주택은 부족했다. 쌀의 가격이 1% 내외에서 상승한 반면 초가집 매매 가격은 66%나 급등했다고 한다.

 

 

 

미개인들

게다가 고위 관료들은 한양의 초가집을 사서 기와집으로 개조해 2배 이상 부풀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라에서 직접 나서 주택매매와 전세금지령을 내려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고위 관료들의 저런 행태는 눈감아 주었고, 오히려 왕실에서 왕자나 공주의 결혼식이 열리면 궁궐 인근의 주택을 시세의 3배 이상 비싼 값에 매입해 별궁을 짓고 결혼선물로 하사하는 미친 짓을 했다.

 

왕실의 혼사가 있다고 소식만 들리면 땅값은 널뛰었다.

 

임오군란 직전에도 순종의 혼례가 있었다.

 

임오군란은 쌀에 모래가 섞여있어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임오군란'마저도 이용한 미개인들

 

이하응(흥선대원군), 임오군란

난병들은 이하응(흥선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이하응은 그들을 달래는 척하며 뒤로는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이하응(흥선대원군)은 이 또한 기회로 삼고, 다시 반외세의 정치사상을 주입하려고 행동했다.

 

그들의 불평은 이하응과 연결되어 민비의 세력과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된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공병 소위를 죽인다.

 

그리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을 포위하고, 습격한다. 그리고 불을 지르고, 일본 순사 등 13명을 살해했다. 일본 공사였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 제물포항으로 도망쳐 영국 배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돌아갔다.

 

1882년 7월 24일(음력 6월 10일) 이하응의 밀명이 떨어졌다. 군민들은 영돈령부사 이최응(이하응의 형), 민창식 등을 살해하고,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난입했다.

 

민비는 궁녀복으로 변복하고 궐 뒷문으로 나가 홍계훈에게 업혀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했다.

 

민겸호와 김보현은 궐에서 발각돼 심하게 구타를 당한 끝에 살해당한다. 민겸호는 총칼에 의해 난도질당했다.

 

이하응은 민 씨들을 파직시키고, 척화파를 임명한다. 그리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면령도 내렸다. 그의 사람들로 채워지며 권력의 방향은 또다시 바뀌게 되었다.

 

일부 가담자들은 민비의 처단까지 해산을 거부하자 이하응은 민비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고, 국모 상(喪)을 공포했다. 그리고 해산을 관철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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