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승호 암살 사건

민승호(閔升鎬)는 1840년 ~ 1874년 음력 11월 28일, 조선시대의 문신이다.

 

민승호는 본래 동령부판사와 공조판서를 지낸 민치구와 부인 전주 이 씨의 차남이었다고 한다. 누이인 여흥부대부인이 남연군의 넷째 아들 흥선대원군과 혼인하면서 왕실과 일가가 되었다.

 

그러던 중 11촌 아저씨뻘 되는 민비의 생부 민치록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이에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봉사손(奉祀孫) 자격으로 1861년에 음설 관직에 올랐다.

 

*봉사손(奉祀孫) -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

 

 

 

민 씨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그는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종 5품)를 제수받았다. 그리고 응교(정 4품), 전한(종 3품), 규장각 직각(정 3품), 가례도감 부제조(정 3품 당상)로 파격 승진을 거치게 된다.

 

1866년 양 누이동생 민자영이 왕비로 책봉되면서 이조참의(정 3품 당상)로 임명된다.

 

1867년 1월 호조참판에 승진되었고,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다.

 

일본이 국서를 보내와서 국교를 요청했을 때, 흥선대원군이 국교 수립에 반대했다. 민승호는 그에 맞서 찬성했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되자 민 씨 족당의 수령이 된다.

 

 


 

민승호 암살 사건(폭사)

 

민승호 폭사

1874년 음력 11월 28일 신원미상의 승려가 민승호에게 선물이라며, 특이하게 생긴 상자를 전해받는다.

 

승려는 "이 상자 안에는 복이 들어있느니 바깥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도록 꼭 안에서 열어오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민승호는 그 당시 정권의 핵심이라 뇌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민승호는 어린 아들과 양어머니 한산 이 씨를 모시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특이하게 생긴 상자는 구멍이 있었고, 자물쇠와 열쇠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민승호는 신기하게 여겨 직접 자물쇠를 열어 상자를 여는 순간, 굉음이 나면서 크게 폭발했다.

 

폭발은 방 한 채가 통째로 날아갈 정도였다. 이때 근처에 있던 양어머니 한산 이 씨와 민승호, 민승호의 어린 아들이 사망한다. 한산 이 씨는 민비의 생모였다.

 

민승호는 온몸이 시꺼멓게 타고, 운현궁을 두, 세 번 가리키며 "운현궁..."이라고 말하고 죽었다. 

 

이후, 민승호 암살 사건에 살인청부를 내린 사람으로 이하응(흥선대원군)을 지목했지만 끝내 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흐지부지하게 끝이 났다.

 

고종과 민비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하응(흥선대원군)

그런데, 흥인군의 저택에서도 누군가 불을 질렀다. 민비의 생각에는 오로지 이하응이었다. 이하응은 흥인군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민승호 암살 사건이나 흥인군의 저택에 화재 사건은 모두 이하응의 음모라 생각하고 비밀스럽게 조사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장 씨라는 사람을 붙잡게 되는데, 그는 신철균의 문객이었다고 한다.

 

신철균은 이하응의 문하(門下)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1875년 11월 흥인군의 저택에서 불이 났다. 의금부는 장 씨를 다시 체포했고, 조사 결과 그는 이하응의 식객으로 드나들던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철균의 집에 머물며 밥을 얻어먹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장 씨는 처형했고, 신철균도 잡아다 신문했으나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했다. 

 

1876년 신철균을 다시 체포하여 국문했다. 결국, 신철균은 대역으로 몰려 참형을 당한다.

 

이유는 신철균의 장모의 예언 때문이었다. 장모는 신철균에게 "내가 점을 쳐보니, 모월 모시에 흥인군 저택에 불이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장모가 말한 날짜에 불이 났었다.

 

장모도 체포되어 엄한 국문을 당했고, 매로 쳐서 죽였다. 신철균의 친무모와 형제, 아들들은 모두 참수형 당했다. 그의 집은 몰수되었고, 부녀자들은 노비가 되었다.

 

관련자로 지목된 운현궁의 하인들 역시 의금부로 투옥되었다가 모두 능지처사(능지처참 陵遲處斬) 당했다.

 

고종은 민승호에게 '충정'이란 시호를 내렸고, 민비는 민승호의 뒤를 이을 아들이 없기 애 민비는 촌수가 먼 민태호의 아들 민영익을 양자로 삼겠다고 한다.

 

민태호는 반대했으나 그의 동생 민규호가 협박했다.

 

"천의(왕후의 뜻)를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양자를 보내어 함께 부귀를 누리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민영익은 민승호의 양자로 들어갔고, 민규호는 이조판서 겸 도통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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