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분조(分朝)는 임시정부나 다름없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조선을 공략했고, 불과 반 달 만에 한성이 함락당했다. 조선 전국이 왜군에게 유린당했다.

 

위급해진 선조는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목적으로 의주 방면으로 꽁무니를 뺄 때, 김 씨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황급히 삼았다.

그리고 왕세자 '광해군'에게 종묘사직을 받들고 본국에 머무르라는 왕명을 내렸다.

 

이때 만들어진 소조정(小朝廷)이 바로 분조(分朝)이며, 세자인 광해군이 있는 곳을 말한다. 선조가 있던 의주 행재소(行在所)의 원조정(元朝廷)에 대한 대칭 개념이라고 보면 된다.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멀리 거동(擧動)할 때에 머무르는 곳.

 

 

 

이미지 출처 - 영화 '대립군'

광해군의 분조(分朝)는 임시정부나 다름없었고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뜻이다.

 

즉, 왕에게 갑작스러운 재앙이나 사고가 일어나면 분조가 정부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런데 광해군의 분조의 경우에는 방패막이 느낌이 강하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강계로 향할 것을 명했고, 자신은 서북쪽으로 도망갔다. 끝내 분조가 구성되었다.

 

분조에는 광해군을 중심으로 영의정 최흥원, 병조판서 이헌국, 우찬성 정탁 등 15명의 대신들과 함께 활동했다.

 

평안도 맹산·양덕, 황해도 곡산을 거쳐 강원도 이천에 자리를 잡고 활방한 활동을 벌였다. 이 지역에 대한 왜병의 위협이 커지자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 성천을 거쳐 영변에 머물며 분조를 이끌어 나갔다.

 

 

 

이미지 출처 - 영화 '대립군'

그 당시 여름철이라 자주 비가 내렸고, 광해군 일행은 민가에서 자거나 노숙을 하며 온갖 어려움을 겪었다.

 

7월 8일(乙丑) - "동궁(광해군)께서 길을 떠나 수다령(수다령)을 넘어 산곡의 인가에서 잤다. 산길이 매우 험하여 열 걸음을 걸으면 아홉 번을 넘어져 일행 대소 관원 모두가 매우 고생했다"

 

이때 광해군은 고군분투한 의병장들과 장수들에게 사람을 보내 상을 내렸고, 관직을 임명하는 등 공을 높이사 격려했다. 의병들의 항전도 독려했다.

 

왜군이 서울에서 물러난 뒤에도 각지를 다니며 병사와 백성들을 격려했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노력했다.

 

광해군 분조를 따르며 공을 세운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 되었다. 하지만 인조반정으로 공신기록이 삭제되었다.

 

 

 

이미지 출처 - 영화 '대립군'

살기 위해 도망친 선조는 조선의 국왕으로써 자격이 없었다.

 

반면 광해군은 왜군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여 죽을 위기를 넘기며, 전장에서 전시 정부를 지휘하며 제대로 된 국왕의 모습을 보이며 점점 리더로 성장해 갔다.

 

광해군의 분조가 자리를 잡자 백성들은 모여들었고, 그들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다.

 

7월 17일 「피난행록」 - 대저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며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광해군)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세자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어서 심지어 눈물을 떨구는 자도 있으며, 경기도의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해 서로 앞을 다투어 적을 잡아서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광해군의 7개월간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 초반 치열한 격전기에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며 위기관리 능력을 훌륭히 수행했고, 훗날 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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