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진짜 범인은 따로있다?!

 

1974년 8월 15일 대한민국에서는 큰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큰 시련을 맞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제2의 을미사변으로 여기며 매일같이 일본 규탄 대회를 펼쳤었다.

 

오전 10시 23분, 서울특별시 장충동 국립중앙극장에서 광복절을 맞아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이 있었다. 연설하는 도중 문세광이 쏜 총탄에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했다.

 

서울의 한 호텔에서 '요시이'라는 남성이 트렁크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꺼낸다. 라디오 안에서 권총을 꺼내 총알 다섯 발을 장전하고, 숨기고 객실을 떠난다.

 

오전 8시 40분, 장충동의 국립극장에 도착한 봉화 양은 앞 줄에 앉은 친구에게 부탁해 자리를 바꿔 앉았고, 크게 기뻐했다. 그 시각 요시이는 차량을 타고 국립극장으로 향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하는 차량에는 통행 허가증이 부착되어 있었다. 또한 참석자들의 가슴에는 각부처마다 다른 색깔과 숫자가 쓰인 비표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요시이가 탄 차량은 통행증도 없었고, 그의 가슴에 비표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 검문 없이 정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삼엄함 경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요시이는 차량 기사에게 만 원짜리 지폐를 주며, 도착하면 문을 열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당시 만 원은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고 한다.

 

기사는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요시이에게 깍득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고 한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

 

입구로 향한 요시이는 경호원들에게 일본어로 "나는 일본의 대사관에서 왔다"라고 했다. 경호원은 최고급 승용차 포드20M에서 내려 기사에게 인사를 받는 모습을 보고 높은 사람이라 여겼다고 한다.

 

요시이는 건물 로비에서 숨죽여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지나 봉황 번호판을 단 차량이 들어왔다. 박정희 대통령은 차량에서 내렸고, 경호원에 둘러싸여 로비로 입장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거리가 더 좁혀지길 기다렸고, 총을 꺼내려는 순간 경호원에 의해 저지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요시이는 기념장 안으로 들어갔다.

 

식장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입장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회색 정장을 입었고, 육영수 여사는 오렌지색 계통의 한복을 입었다.

 

애국가 제창이 끝나고, 박정희 대통령 경축사가 시작된 지 1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요시이가 소리를 지르며 무대로 질주했다. 총을 쏘기 시작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경호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무대로 급히 올라왔고,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숨겼다. 관객 중 한명이 통로를 달려오던 요시이의 발을 걸었다. 그리고 또다시 총성이 울렸다.

 

총격이 끝이나고, 관객들과 경호원들이 요시이를 덮쳤다. 이때 미동도 없이 육영수 여사가 쓰러졌다. 경호원들은 육영수 여사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리고 합창단석에서도 비명이 들려왔다. 오전에 자리를 바꿨던 봉화 양이 쓰러져있었다. 그녀는 한 달 동안 노래를 연습했는데, 부르지도 못했다.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지만 사망했다.

 

이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었고, 두 사람이 실려나간 후, 예정대로 행사는 진행되었다.

 

육영수 여사의 담당의는 "두부 관통 총상을 당한 상태였다. 쇼크 상태로 의식은 없고 호흡만 유지하는 상태였다"라며 4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하고, 긴급 수혈까지 했으나 결국 사망했다.

 

요시이는 23세의 재일 교포 '문세광'이다. 당시 언론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박정희 암살을 도모했으나, 엉뚱한 희생자를 낳았다고 전했다. 당시 사건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여러 음모론이 만들어졌다.

 

 

 

육영수 피살사건

 

현장 사진과 영상 등의 분석을 통해 총성이 울린 곳과 문세광이 있던 곳이 일치하지 않는 것에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문세광이 사형 직전 이런 말을 남겼다. "나를 사형한다고? 뭔가 잘못됐어. 그 놈들한테 속은 내가 바보지"

 

때문에 범인이 바꿔치기됐다는 설이 생겼다.

 

문세광의 권총에 장전된 총알은 5발, 사건 발생 후 권총에 남은 총알은 1발.

 

당시 현장에서 울려퍼진 총성의 숫자가 동일하지 않음. 영상을 통해 확인된 총성은 최소 6발에서 최대 7발. 적어도 2발 ~ 3발은 문세광이 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런데, 육영수 여사 피살 사건은 감식반이 현장에 파견되기도 전 중간 수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경찰이 나서기 전 중앙정보부가 먼저 나섰다.

 

사건 직후 문세광은 남산의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았고, 사건 발생 다음 날, 감식반이 현장에 출동해 현장을 감식했다. 

 

감식반에 의해 첫 번째 탄흔은 문세광이 앉은 자리에서 발견, 처음 총성이 바로 그자리다. 문세광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다가 오발된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두 번째 탄흔은 연설대 좌측, 세 번째 탄흔은 태극기 좌측, 마지막 탄흔은 천장.

 

이 탄흔들 중 육영수 여사와 봉화 양을 저격한 탄흔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제 총알을 찾아야 하는데, 총알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감식반이 도착하기 전에 청와대 경호실에서 모든 총알을 가져갔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 장례식

 

경호실에서 수거한 4개의 총알을 국과수에 넘겨 조사를 의뢰했다. 조사결과 좌석 옆자리, 연설대 옆, 태극기 뒤, 세 개의 총알은 문세광의 것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총알은 봉화 양의 좌석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데, 문세광의 것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그 당시 이 총알이 누구것인지에 대해서는 극비에 부쳤다.

 

그리고 31년 만에 밝혀졌는데, 경호원 최 씨가 봉화 양을 쏜것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최 씨는 인정했고 "어쨋든 간에 괴로웠다. 마음이 착잡하고 기분이 안 좋았다. 각하를 경호해야 하니 지향 사격 한 발을 했는데 그 한 발이 봉화 양을 맞힌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건 발생 4일째, 무대 동북쪽 장막 밑에서 총알이 발견되었고, 국과수 감정 결과 문세광의 것이 아니었다. 총 5개의 총알이 발견되었고, 육영수 여사를 관통한 총알만 찾으면 된다.

 

30년이 지나고, 공개된 수사 기록 일부 중 총알을 찾아냈다.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그 총알은 국과수에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청와대 경호원 몇몇과 총알을 찾다가 무대 뒤 벽에서 총알 한 개를 습득하고 경호관들에게 주었다고 하나, 이 총알을 인수한 경호관의 성명은 알 수 없어서 회수할 수 없었다"라며 분실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 요이시 문세광

 

그 당시 수사본부는 문세광의 배후로 조총련을 지목했었다. 조총련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로 일본에 거주하는 친북한계 재일동포 단체다.

 

문세광이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어 지령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문세광도 동일한 증언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 경찰은 조총련이 사건에 관여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리고 문세광은 조총련이 아니라, 남한을 지지하는 재일 동포 단체인 민단 소속이었다고 한다. 민단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라고 하는데,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동포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유가 뭘까?

 

문세광은 최악의 빈민촌 오사카 이카이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 재일 동포로 살아가는 것은 가혹했다고 한다. 천대와 차별이 심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 1년 전, 일본에서는 KT 납치사건이 발생했다. 

 

그로인해 한일 관계는 최악이었고, 재일 동포들의 삶은 더욱 비참해졌다. 일본 내 한국인에 대한 핍박이 갈수록 심해지자 재일 동포들 사이에서는 김대중 구출 위원회까지 조직되었다. 문세광도 이 단체에서 활동했다.

 

김대중 구출 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협박 전화를 했고,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문세광은 "나는 조국에 혁명의 바람을 몰고 오는 구국의 영웅이 될 거야"라며 박정희 암살을 결심했다고 한다. 문세광은 독재정권만 무너뜨리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저격 사건 하루 전,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외교관들은 무관하며 범인은 찾지 못했다"라며 수사를 종결했고, 다음 날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이 벌어졌다.

 

 

 

요이시 문세광

 

아무튼 이사건으로 한국 정부는 조총련이 배후라며 일본에 수사를 요청하며 압박했다. 일본 정부는 수세에 몰렸다. 대한민국 민심도 폭발해 "또다시 국모를 죽인 일본에 원수를 갚자"라며 이 사건을 제2의 을미사변으로 여기며 매일같이 일본 규탄 대회를 펼쳤다.

 

일본에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으면 외교를 단절할 것이라 엄포를 놓았고, 일본 부총재가 직접 방문해 사과하고 조총련 규제까지 약속했다. 그리고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은 흐지부지하게 종결됐다.

 

1974년 10월 19일 오전, 문세광은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등 6가지 죄목 유죄로 사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3일 뒤 사형 집행되었다.

 

문세광은 사형 집행 전 한참을 흐느끼고 최후 진술했다고 한다. '나는 바보였습니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니다. 박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십시오. 국민들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주세요. 육 여사와 죽은 여학생의 명복을 저승에 가서도 빌겠습니다. 저놈들에게 속아서 이러한 과오를 범한 나는 바보였으므로 사형을 당해도 당연합니다'

 

교수대에서는 마지막으로 "나를 죽인다고? 뭔가 우습다. 뭔가 잘못됐어"라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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