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에 따르면 온달은 흙수저다. 몹시 가난했고,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했다.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길거리를 다녔으며, 굶주림을 참다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곤 했다.
그런 온달이 평강공주와 결혼하고부터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평강공주가 온달과 결혼한 이유는 아래의 링크를 통해 참고하면 된다.
평강공주는 온달이 고구려의 훌륭한 장수가 되도록 열심히 도왔다. 온달은 평강공주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서 글공부와 말타기, 활쏘기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고구려에서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 언덕에서 사람들이 모여 사냥대회를 열었고, 사냥으로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 신에 제사를 지냈다. 그 당시 사냥을 좋아했던 고구려의 평원왕도 참석했고, 신하들과 병사들도 함께 사냥을 했다.
온달은 평강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참여하게 된다. 온달은 지금까지 닦은 실력을 뽐냈다. 사냥 실력은 최고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평원왕도 온달을 보고 싶어 했다.
"그대의 이름이 무엇인가?"
"저는 온달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온달이라고!?"
평원왕은 깜짝 날랐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놀랐다. "그 바보 온달이라고?"
흙수저였던 온달은 뛰어난 무예 솜씨로 장군으로 등용되는 특혜를 얻었다. 그 당시 사냥대회는 고구려의 인재 선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고구려는 신분에 상관없이 재주만 있으면 출세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온달의 사냥 솜씨로 왕의 사위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578년경 북주의 무제왕이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북주는 북중국의 서쪽 지역에 있던 나라인데, 동쪽에 있던 북제 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다.
평원왕은 배산 아래 들판에서 북주의 무제왕을 맞이했다.
온달장군은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웠다. 적진에 들어가 수십여 명의 목을 베어버렸고, 고구려 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해 크게 이겼다.
싸움이 끝나고, 모두가 온달장군의 공을 높이 샀다. 평원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온달장군)은 나의 사위다"라고 하며, 예를 갖추어 영접하고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대형(大兄) - 고구려의 14개 관등위 중 제7등위 관등
이때부터 평원왕은 온달장군을 총애했고, 온달장군은 계속 성장했다.
590년 평원왕이 죽고, 영양왕이 즉위했다. 온달장군의 직위는 올라갔고, 영양왕에게 평소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아뢰었다.
"신라가 우리 한강 유역의 땅을 빼앗아 저들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곳의 우리 백성들은 하루빨리 자신들을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믿어 주시어 군사를 주신다면 반드시 고구려의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은 대륙에서 밀려오는 적의 싸움에 전력하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고구려의 주변 정세는 북방에서는 돌궐이 약화되고, 중원에서는 수나라가 새롭게 통일국가를 이뤄 고구려를 공격하려고 간을 보고 있었다.
때문에 수나라가 위협하기 전, 후방을 손볼 필요가 있었다. 온달장군의 제의는 받아들여졌다.
온달장군은 전장에 나가기 전에 평강공주에게 맹세했다.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온달장군의 의지는 대단했다. 온달장군은 아차성을 공격했고, 신라군과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장예를 치르고자 온달장군의 관을 옮기려고 했는데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온달장군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한 때문이라 여기고, 평강공주를 모셔왔다.
평강공주는 온달장군의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장군, 살고 죽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이제는 돌아갑시다"
그러자 관이 움직였고, 온달장군의 시신은 평양으로 옮겨졌다.
영양왕도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 백성들도 고구려의 영웅 온달장군의 죽음 앞에 크게 슬퍼했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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